지난번 현채인들의 입장에서 푸념 섞인 글을 써봤는데요. 이번에는 입장을 한 번 바꿔서, 주재원분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합니다. 역지사지 아시죠?
물론 밖에서 보면 집 해주고, 차 해주고, 자녀 학비까지 지원해 주니 팔자 좋은 직장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재원 타이틀 뒤에 숨겨진, 때로는 그 혜택들조차 다 뱉어내고 당장 한국으로 도망가고 싶어 할 만한 그들의 팍팍한 속사정도 한 번쯤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1. 퇴근이 없는 시차 지옥 (K본사와의 24시간 2교대)
오후 5시, 현채인들이 퇴근하고 나면 주재원들의 두 번째 출근이 시작됩니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이 밝아오면 쏟아지는 본사 임원들의 전화, 카톡, 긴급 자료 요청... 현채인들은 주말이나 저녁에 확실한 워라밸을 지키며 오프(Off) 모드가 되지만, 주재원은 본사에서 "김 과장!" 하고 찾으면 새벽 2시라도 랩탑을 열어야 하는 24시간 대기조입니다. 많이 받는 만큼 일하라고요? 맞습니다. 수면 시간을 갈아 넣는 주재원들도 있습니다.
2. 본사와 현지 사이의 인간 방패
주재원의 가장 큰 고통은 한국 본사의 막무가내식 지시와 미국 현지의 합리적 거부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는 겁니다.
본사에서는 비용이 얼만데 라인을 세워? 다음 주까지 무조건 세팅 끝내라고 압박하는데, 현채인 엔지니어들이나 현지 작업자들은 미국 법규상, 그리고 품질 절차상 절대 불가능하다라고 선을 긋습니다. 양쪽 문화와 시스템이 충돌할 때, 본사 임원에게 쌍욕을 먹어가며 총알받이를 하고, 현채인들에게는 아쉬운 소리 해가며 어떻게든 멱살 잡고 공장을 굴러가게 만드는 게 주재원의 숙명인 듯합니다.
3. 복지 혜택? 그건 가족을 볼모로 잡힌 위험수당
렌트비와 차량 지원이 꿀 같아 보이지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본국에서의 안정적인 커리어와 가족의 인프라를 통째로 뽑아 들고 온 것에 대한 위험수당에 가깝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우울증을 겪는 배우자, 현지 학교에 적응 못 해서 겉도는 아이들을 볼 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미국에서 이 짓을 하나 싶어 주차장 차 안에서 남몰래 한숨 쉬는 가장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4. 현채인에겐 이직이 있지만, 주재원에겐 퇴로가 없다
현채인들은 회사가 마음에 안 들고 조직 문화가 엿같으면 다른 벤더사로 쿨하게 이직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주재원은 꼬리표가 붙습니다. 여기서 성과를 못 내거나 현지 관리에 실패해서 한국으로 짐 싸서 쫓겨가듯 돌아가면, 본사에서의 남은 커리어는 사실상 끝납니다. 말 그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미국 땅에 서 있는 셈입니다.
5. 우리 결국 다 같은 처지의 직장인 아닐까요?
물론 주재원 중에서도 과거의 권위주의에 쩔어서 골프나 치러 다니고, 현채인들 쥐어짜며 꿀 빠는 주재원 꼰대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로 인해 현채인분들이 느끼는 불합리함과 박탈감은 화가 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실무진 주재원들은 척박한 제조업 환경 속에서, 본사의 비현실적인 압박과 현지의 팍팍한 현실 사이에서 매일매일 피를 말리며 버티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조금은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보상의 형태와 신분은 다르지만, 결국 빡센 앨라배마·조지아 자동차 바닥에서 매일 아침 I-85를 타며 다 같이 고생하는 처지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고충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고 함께 윈윈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